[서양미술사를 보다] - 현대 모더니즘부터 다다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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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스토리

[서양미술사를 보다] - 현대 모더니즘부터 다다이즘

by molbania3 2022.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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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를 보다]

 양민영

PART 8 : 현대미술


 

20세기 인류는 두 번의 전쟁을 겪고 커다란 사회변화에 직면한다. 미술도 이젠 결과물 위주에서 발상부터 결과까지 창작의 전 과정을 중시하게 된다. 그래서, 색을 해방시키고 형태를 해방시키고  현대에 나타난 다다이즘은 "미술은 더 이상 고상한 게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이제 종교. 이념. 인종, 사회갈등 다양한 이념적 패러다임을 갖게 되고,  이해하기 힘든 생각들이 복잡한 사회만큼,  이해하기 힘든 그림들이 난무한다.  솔직히 잘 모른 채 현대미술을 보게 되고 그저 아는 척 고개를 끄덕거리면 될 듯하다.


 1. 모더니즘 - 야수파, 표현주의

 

원근법, 명암. 점묘법 등등의 기법에는 관심 없다. 기법에 관심 없는 화가들은 강열한 대비 색을 사용하여(야수파) 그림이 말해주는 건 , 내면의 인간 심리임을(표현주의) 제시한다

 

 

<마담 마티스>(1905년 앙리 마티스)

마담 마티스(1905년 앙리 마티스)
마담 마티스

<마담 마티스>(1905년 앙리 마티스 , 프랑스) 모든 회화기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강열한 색채만으로 사람의 심리를 보여주고 있다. 더 이상 채색의 기법은 필요 없다. 강한 색을 넓게 발라서 강한 인상을 만들고 전해 주고자 하는 감정을 채색으로만으로 보여준다.  짙은 채색과 굵은 선은 그녀의 강함과 단호함이 보인다.  관객은 강열한 채색과 선에 야수를 만난 기분이 들 거라고 해서 그래서 야수파의 시작인  그림이다.

 

 

<붉은 조화>(1908 마티스)

붉은 조화(1908 마티스)
붉은 조화(1908 마티스)

<붉은 조화>(1908 마티스)

원색을 바탕으로 사람이나 사물은 원근감을 잃고 단순해져 버렸다. 사람인지 벽지 인지도 모호하여 관객의 시선을 흩뜨린다. 이전의 미술은 대상을 그리거나 대상에서 느끼는 인상을 그렸지만 20세기 미술은 화가의 주관적 사상을 표현하여 없는 대상을 창조하게 된다.  모르겠다. 뭘 하려는 건지  혹시 그냥 벽지를 그린 것이 아닐까? 마티스는 말한다. " 그냥 그림일 뿐입니다."

 

 

 

<절규>(1893년 에드바르 뭉크)

절규(1893년 에드바르 뭉크)
절규

<절규>(1893년 에드바르 뭉크, 노르웨이) 표현주의 화가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를 그린다. 기억하자 그전에는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찾거나, 대상에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이입하여 그리거나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창작하게 된다. 이 그림에서 사실적인 사람과 자연은 없다.  모두 현대의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나타내는 대상이 있는 것뿐이다.  관람객 또한 똑같은 위기의 자신을 보는 것으로 공감을 이끌어 낸다. 이 그림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가진 그림이 있을까 싶다.  또한 이 그림만큼 많은 패러디를 만든 그림이 없을 거다.

 

 

 

<카를 요한의 저녁>(1892년 뭉크)

카를 요한의 저녁(1892년 뭉크)
카를 요한의 저녁(1892년 뭉크)

또 다른 그림 <카를 요한의 저녁>(1892년 뭉크) 아,  이표 정 없는 사람들, 10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들의 얼굴이 아닌가. 이만큼 화가는 현실에서의 인간을 철저히 파악하고 인간의 깊은 감정을 이미 알고 있는 감성적인 천재인 것이다. 뭉크의 작품을 영혼을 그린 그림이라고 부른다. 물론 그의 심리상태도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드레스덴의 거리>-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드레스덴의 거리-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드레스덴의 거리-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드레스덴의 거리>(1908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독일) 뭉크의 <카를 요한의 저녁>과 그 이야기는 같지만 한층 더 불안한 사람들 원색을 사용하여 그 불안의 강도가 커지고 가면 같은 얼굴의 사람들 사이의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화려해진 채색으로 뭉크의 그림보다 더 풍요해진 현대에 그로 인해  화려한 삶을 살지만 더 외롭고 더 삭막해진 사람들을 본다.

 

 

<마르첼라>(1910년 키로히너, 독일)

마르첼라(1910년 키로히너, 독일)
마르첼라

<마르첼라>(1910년 키로히너, 독일) 여인의 누드화, 지금껏 보아왔던 완벽하고 관능적인 여인들과는 전혀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올랭피아는 도도함이라도 있지만,  이 여인은 짙은 화장으로 섹시함을 강조하지만 , 점차 인간성이 사라져 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불안함을 보인다. 거친 붓질과 굵고 짙은 선 왜곡된 형상이 더욱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인상 III - 콘서트>- 바실리 간단스키

인상 III - 콘서트 바실리 간단스키
인상 III - 콘서트 바실리 간단스키

<인상 III - 콘서트>(1911년 바실리 간단스키, 러시아, 뮌헨 렌바흐하우스 시립미술관) 색과 형태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는 음악에서 회화의 새로운 영감을 찾는다. 음악에 형태가 있던가, 그림 역시 요동치는 색과 선 만으로도 충분히 말하고 들려주고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주장은 맞았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연주회에서의 음악을 듣게 되는 기분이 들것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음악이 흐르는 회화의 만남이. 

 

화면 가득한 노란색은 지금 연주되는 음악이 무엇 인지를 말해준다. 비발디의 협주곡 "봄"이 아닐까? 아니면 혹시 "벚꽃엔딩" 인가?  정말 그런가? 사람들의 감정을 들뜨게 한다. 이런 추상을 뜨거운 추상이라고 한단다. 그러면 차가운 추상은? 아래 그림이다.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1930년 피에트 몬드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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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또 다른 추상화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1930년 피에트 몬드리안, 네덜란드) 칸딘스키의 추상화와 비교된다.  차가운 추상이라고 한다.  대상의 감성보다는 이성적인 질서를 찾아낸다. 색의 물리학이라고 할까? 그래도 이 질서 정연한 색과 선 면이  대상의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믿었다. 대상의 본질을 나타낸다고?  이건 감정의 뼈대이고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살을 붙이면 된다는 것인가?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브로드웨이 부기우기>(1942년 몬드리안) 이건 어떤가, 단순하고 질서 있는 구성이지만 복잡하고 시끄러운 느낌, 맞다 뉴욕의 시끄러운 거리를 그렸으니.. 몬드리안의 그림은 차라리 한 편의 소설이다  관객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넓혀준다. 이 그림 속에서 우리는  뉴욕의 거리를 달리는 노란 택시와 섹스 인 더시티의 주인공들이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시끄러운 수다 속에 빌딩 사이를  걸어가는 모습을 그리는 건 나만의 상상인가?


2. 다다이즘(바보같이 순진한)

 

<샘, sam>(1917년 마르셀 뒤샹)

샘, sam(1917년 마르셀 뒤샹
샘, sam(1917년 마르셀 뒤샹

<샘, sam>(1917년 마르셀 뒤샹 , 프랑스) 기성세대의 문화를 거부하는 예술, 특정 예술 언어는 없다. 다만 우연과 레디메이드 된 것을 "작가가 선택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도 예술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란 것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 작품은 샘이라는 제목에 리처드(벼락부자)라는 가명으로 뉴욕 전시회에서 출품, 단박에 거절당한다. 아마도 벼락부자들의 몰상식과 천박함에  똥이나 먹어라는 뜻 이리라 생각해 본다. 원작은 없어지고 복제본이 파리 퐁피두센터에 있다.

 

이렇게 다다이즘의 실험정신은 예술의 벽을 허물기 시작한다. 예술과 일상의 구분도 점차 없어진다.

 

 

 

<L.H.O.O.Q.>(1919년 뒤샹)

L.H.O.O.Q.(1919년 뒤샹)
L.H.O.O.Q.(1919년 뒤샹)

<L.H.O.O.Q.>(1919년 뒤샹) "엘아슈오오뀌"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 이 장난 같은 작품은 그의 설명에 따르면 명작이나 천재에 대한 관람객의 숭배심을 파괴하고자 했다는데, 해석이 더 좋다. 기존의 미술에 도전하는 현대의 용감한 미술가들의 지표라고... 하는데... 어쩌라고....

 

어쨌든 다다이즘은 새로운 시도를 감행한다 그래서 일상의 모든 것이 예술이라고 말한다. <비츠 공간 변조기>(1930년 라즐로 모홀리-나기, 헝가리) 심지어 기계의 움직임에 따라 공간 속의 빛의 변화를 만드는 것도 예술이 된 것이다.  21세기의 현대미술의 저변에는 이런 다다이즘의 발칙하고 엉뚱한 변혁이 반영된 것이다.


 

이제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넘어가자

 

<인생>(1903년 파블로 피카소 , 스페인) 그는 삶의 불행과 노동의 고통을 푸른색으로 그린다. 아마도 불우했던 시절에 감상이 표현됐다. 피카소의 그림에서 이런 그림을 생각이나 해봤겠나? 그의 초기 작품으로 절망적인 표현과 우울한 색채를 볼 수 있다. 이후 안정적인 정착을 통해 그의 예술적 감성이 폭발하게 된다.

 

인생
인생

 

그러던 어느 날, 아프리카 콩고에서 온 하나의 탈을 보게 되고 그 단순한 힘에 푹 빠지게 되고 , 바로 이 그림 20세기 입체파의 시작을 알리는 이 그림을 그린다.

 

 

<아비뇽의 처녀들>(1907년 파블로프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1907년 파블로프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아비뇽의 처녀들>(1907년 파블로프 피카소, 스페인) 전통적인 원근법과 구성, 심지어 시선까지 급진적으로 깨뜨린다. 세잔의 다중적 시선을 같은 표면에 그려 넣고 새롭게 구성된 것이다. 관객이 그림을 보고 있듯이 그림 속의 대상도 관객을 보는 시선은 대립된다. 뭘 보는 거지? 묻는듯한 시선에 결국 관객이 어쩌지 못하게 되는 감정을 갖게 만든다. 가히 20세기 입체파의 대표작이라 하겠다.

 

 

<다니엘 헨리 킨 바일러의 초상>

다니엘 헨리 킨 바일러의 초상
다니엘 헨리킨 바일러의 초상

<다니엘 헨리 킨 바일러의 초상>(1910년, 피카소) 그리고 더 나아가서 형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기법도 실험한다. 킨 바일러라는 화상의 초상화이다. 사람이 조각조각 분해돼서 그에게 느끼는데 철학적 감성적 느낌으로 그의 모든 것을 한 화면에 다시 구성되는 것이다. 이후 이런 유의 그림이 많아진다.

 

피카소는 참으로 열정적인 사람이다 수많은 그림을 그렸고 나치즘과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반대해서 프랑스 공산당원이 되기도 했고 전쟁의 참상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비판에 참가한다

 

 

 

<게르니카>

게르니카
게르니카

<한국에서의 학살>

한국에서의 학살
한국에서의 학살

그 첫 번째가 <게르니카 >(1937년, 피카소) 스페인 내전 당시 히틀러와 프랑코의 독재자들의 폭력과 전쟁에 대한 고발로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려 그. 잔혹함을 고발한다. 파괴된 소도시 게르니카는 참혹했다.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 피카소) 한국전쟁 당시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 다시 후퇴하는 혼란의 난리 통에서 일어난 미군에 의한 황해도 신천의 양민학살을 소재로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는 어디서든 전쟁에 대한 고발을 서슴지 않았다. 아래 그림은 <한국에서의 학살>이고 고야의 그림이 모티브이다.

 

<우는 여인>(1937년 피카소) 

우는 여인(1937년 피카소)
우는 여인(1937년 피카소)

그의 마지막 작품, <우는 여인>(1937년 피카소) 

오른쪽 얼굴 모습과 왼쪽의 얼굴 모습을 한 화면에 그려 넣어서 슬픔을 강조한다. 형태만을 분리 조합뿐 아니라 감정을 만들어 내고 색채의 부조화로 슬픔에 불안한 감정을 더한다. 후기 입체주의 작품이다. 가운데 흰색 부분은 손수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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